[김낭기의 관점] '야당 거부권' 무시하면 공수처는 있으나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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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05 11:15
수정 : 2020-11-0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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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국가기관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수처만큼 특이한 조직은 없다. 공수처장 임명 과정에 야당의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국가기관장 임명에 야당 거부권을 인정하는 곳은 하나도 없다. 공수처장이 유일하다. 야당 거부권은 공수처다운 공수처를 만들기 위한 핵심 장치다. 공수처의 생명줄과도 같다. 그 생명줄이 지금 끊어질지 모를 위기에 놓여 있다. 여당의 압박과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장은 국회의장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빼고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국회 임명 동의 절차를 거치는 방법이다.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국회 인사 청문회를 거치는 방법이다. 국정원장,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정, 국세청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다.셋째는 대통령이 바로 임명하는 방법이다.

 '야당 거부권' 인정은 공수처장이 유일

이 중에서 임명 절차를 통과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방법은 무엇일까. 얼핏 보기에 국회 임명 동의 절차일 것 같다. 그러나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소야대 국회라는 특수 상황이 아닌 한 야당 반대로 임명 동의가 무산되기는 불가능하다. 국회 임명 동의 절차는 겉으론 까다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당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이 호랑이와 같다. 국회 인사 청문 절차는 ‘종이 호랑이’마저도 안 된다. 국회 임명 동의 절차에서는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경우라면 야당 뜻대로 임명을 무산시킬 수도 있지만, 인사 청문 절차에서는 야당이 반대해도 대통령이 얼마든지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야당 반대로 인사 청문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는데도 대통령이 임명한 사례가 20번에 가깝다.

임명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자리는 다름 아닌 공수처장이다. 공수처장은 국회 임명 동의 대상이 아니다. 인사 청문회만 거치면 된다. 그런데도 관문 통과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야당의 거부권 때문이다. 공수처장은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회가 위원 7명 중 6명 이상의 동의로 후보 2명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1명을 지명한 뒤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한다. 추천 위원 7명 중 2명이 야당 추천위원이다. 6명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야당 추천위원 2명이 반대하면 아예 후보가 될 수 없다. 국회 임명 동의 절차에선 여소야대가 아니면 야당이 임명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공수처장은 여소야대가 아니더라도 야당이 얼마든지 임명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추천 위원 7명은 당연직인 추미애 법무부장관, 조재연 법원행정처장, 이찬희 대한변협회장, 민주당이 추천한 김종철 연세대 로스쿨 교수와 박경준 변호사, 국민의힘이 추천한 임정혁 변호사와 이헌 변호사다. 추천위원회는 지난 10월 30일 정식 출범했다. 11월 9일 오후 6시까지 위원 별로 당사자 동의를 거쳐 최대 5명의 후보를 제시하기로 했다.

민주당, 야당에 '거부권 행사 말라'  윽박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벌써부터 여차하면 야당 거부권을 없애버리겠다고 으르고 있다. 허영 민주당 대변인은 “야당 추천위원들이 비토(거부권)를 반복하고 시간 끌기로 나온다면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인호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늦어도 무조건 11월(말)까지는 (공수처장 후보자) 인사 청문회도 다 마치고 공수처장 임명 관련 모든 절차를 끝내야 된다”고 했다. 최 대변인은 “야당의 법 악용이 계속될 경우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밖에 없다. 추천위가 구성되고 난 뒤 한달 안에 처장 임명을 끝내도록 하거나, (의결 정족수를 6명에서) 5명으로 줄이는 안까지 법사위에 계류 중이거나 대안으로 검토중이다”라고 했다. 야당이 거부권을 이용해 공수처정 임명을 지연시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의결 정족수를 6명에서 5명으로 줄이면 야당 의원 2명이 반대해도 후보를 추천할 수 있게 된다. 야당 거부권이 없어지는 것이다.

공수처장 임명에 야당 거부권을 인정한 이유는 공수처 설립의 대의명분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공수처 설립의 명분은 정치적 중립성과 업무의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수사기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간 검찰이 죽은 권력, 지나간 정권 비리에는 잔인할 정도로 수사권을 휘두르면서 살아 있는 권력, 현재 정권 비리에는 ‘알아서 기는’ 행태를 되풀이해 왔다는 반성에서 공수처를 설립하게 됐다.

공수처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한 제도가 처장 임명에 대한 야당 거부권이다. 정권 눈치 보고, 정권에 아부하고, 정권에 알아서 기는 공수처가 되지 않으려면 공수처장부터 그렇지 않을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는 국민 염원을 반영한 조치다. 검찰총장 임명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각계 의견을 들어 하겠다면서 2012년 검찰총장 후보 추천위원회를 도입했다. 그러나 검찰총장 후보 추천위원회는 법무부가 위원 구성을 주도하게 돼 있어 임명 과정에서 정부 뜻을 견제하기가 불가능하다. 정권 눈에 드는 사람을 얼마든지 총장으로 임명할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 따라 공수처장 임명에는 후보 추천 과정에서 야당 거부권이라는 실질적 견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공수처장 역할·권한 절대적···공수처 신뢰 좌우

공수처장의 권한과 역할은 절대적이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처장은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을 지휘·감독한다. 공수처 검사는 처장의 지휘·감독에 따라야 한다. 공수처장은 공수처 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직접 처리하거나 다른 검사에게 처리하게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공수처 검사가 처장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 검사를 배제하고 다른 검사에게 수사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공수처장은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중인 고위공직자 범죄 사건에 대해 공수처로 넘기라고 요구할 수 있고 이 경우 검찰이나 경찰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공수처는 판·검사, 경무관 이상 경찰 간부의 범죄에 대해선 수사권과 함께 기소권을 갖는다. 이들을 제외한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해선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리면 공수처장은 법원에 불기소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재정신청을 할 수 있다.

공수처장의 권한과 역할이 이처럼 막중하기에 공수처가 정말로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기관이 되느냐 여부는 공수처장에 달려 있다. 공수처장이 정권에 충성하거나 정권 눈치나 보는 사람이라면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킬 리 없다. 공수처장이 그런다면 그 밑의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이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려 할 리 없다. 공수처는 또다시 정권에 충성하는 기관이 될 수밖에 없다.

공수처장을 가급적 빨리 임명해 공수처를 조속히 출범시키자는 민주당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독립성 확보라는 공수처 설립의 근본 취지까지 훼손하면서 밀어붙일 일은 아니다. 야당 거부권의 폐지까지 거론하며 야당을 압박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인물이 공수처장이 된다면, 그래서 공수처 설립이 친정권 수사 기관을 하나 더 만드는 꼴이 된다면 공수처를 굳이 만들 이유가 없다.

야당을 압박하기보다는 야당도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중립적 인물을 후보로 추천하는 것이 순리다. 정권에 편향되지 않은 인물 중에서도 얼마든지 후보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야당에 ‘법을 악용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기 전에 악용할 이유가 없는 후보를 내는 게 먼저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야당과의 협치를 강조했다. 야당 거부권을 존중하는 것은 협치의 대표적 사례다. 그동안 정부·여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협치를 다짐해 왔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긴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야당 탓만 했다. 그러나 협치는 강자의 덕목이다. 협치의 전제 조건은 상대방에 대한 포용이다. 포용은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민주당이 협치의 주도자이자 책임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야당 압박 전에 야당 동의할 후보 세워야

처장 후보 2명을 여당 측 1명, 야당 측 1명으로 정할 수도 있다. 일종의 타협책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대통령이 여당 측 후보를 임명할 것은 뻔한 일이다. 여당과 야당 측 후보 1명씩을 추천하는 것은 사실상 야당의 거부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야당 거부권을 도입한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추천 위원인 이찬희 대한변협회장도 지난 1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통령에게 복수의 후보를 추천하게 되면 그중엔 반드시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이 들어가게 돼 있다. 2명을 추천하면 여당 몫과 야당 몫으로 1명씩 포함될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 입장에선 누구를 지명하겠나. 형식적인 추천 절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냥 구색 맞추기가 돼 버리는 거다.”

“정치는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원칙이나 규범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따라 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이다. 민주당은 불리할 때면 이 말대로 해 왔다. 자기 당 소속 시장들의 성추문으로 보궐 선거를 실시하게 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에 당헌을 바꿔가며 후보를 내기로 한 것이 그 사례의 하나다. 정치를 현실로만 본다면 공수처장 임명에 대한 야당 거부권을 무시하거나 없애는 것은 전혀 괘념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라는 말에 안주하면 영원히 3류, 4류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주당이 공수처장 임명에서만이라도 법의 기본 취지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1류 정치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새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전통을 남기게 될 수 있다. 우리 정치에도 그런 순간이 한 번은 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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