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조사실에서 피의자 수갑 채워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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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4-08 22:52
수정 : 2020-04-08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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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지금 뭐하는 거냐?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지난 2015년 5월 26일 수원지검에 있는 한 조사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A씨를 조사하던 담당 검사와 그의 변호인 B씨 간에 날선 말들이 오갔다.

사건의 발단은 A씨의 양손에 채워진 수갑이었다. 구속된 A씨가 피의자신문을 받기 위해 변호인 B씨와 함께 조사실로 들어갔다. 담당 교도관은 A씨가 조사실에 들어가기 전에 포승줄을 풀어주었으나, 수갑은 채운 채로 두었다.

변호인은 A씨의 수갑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인정신문을 끝낸 후 수갑을 풀어줄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인정신문이란 피의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말한다. 변호인은 “피의자가 자리에 앉은 이상 조사가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수갑부터 풀어야 한다.”며 일어선 채 10여 분 가량 A씨의 수갑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담당 검사는 변호인에게 “변호인의 행동은 명백히 수사 방해에 해당한다”며 “즉각 검사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지만 변호인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 검사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수사관 2명에게 변호인을 강제로 끌어내도록 조치했다. 변호인은 수사관들에게 양쪽 팔이 잡힌 채 검찰청사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에 A씨와 그의 변호인 B씨는 “담당 검사의 수갑 해제 요청 거부는 잘못된 것으로, 취소(수갑 해제)해야 한다”며 수원지방법원에 준항고장을 냈다. 준항고란 수사 중 검사가 피의자에 대하여 내린 조치를 취소하거나 변경해달라며 내는 이의신청을 말한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대한변호사협회도 성명서를 통해 “검찰은 피의자에게 위법적인 방법으로 수갑을 사용하여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규탄했다.

재판에서 검찰은 “A씨와 함께 송치된 다른 피의자가 국가정보원 조사 당시 자해를 시도했기 때문에 A씨도 자해·도주 우려가 있었다”며 맞섰다. 본인 확인 절차를 끝내고 수갑을 풀어도 될 것인지 확인하는 중이었는데 변호인이 이를 여러 차례 방해해 관련법에 따라 변호인을 내보낸 것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수원지방법원 형사 제2단독부 황재호 판사는 “피의자의 수갑을 풀어주고 인정신문을 시작하는 것이 원칙인데 검사가 변호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A씨의 수갑을 풀어주지 않은 것은 위법하다”며 지난 2015년 7월 A씨 측 손을 들어주었다.

검찰은 담당 재판부의 판단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재항고 신청했다. 재항고란 항고장을 제출한 법원이나 고등법원에서 재판 진행 중에 내린 담당 재판부의 결정에 대한 불복 방법이다. 담당 재판부가 내린 결정이 정당한지 여부는 대법원에서 심리한다.

그러나 대법원 역시 원심의 판단과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 제2부(재판장 안철상 대법관)은 지난달 17일 이 사건을 심리한 대법관들의 만장일치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며 검사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구금된 피의자를 신문할 때 피의자 또는 변호인으로부터 보호장비(수갑)를 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거부한 조치는 ‘구금에 관한 처분’에 해당한다”고 전제했다. 형사소송법 제417조는 수사기관이 한 ‘구금에 관한 처분’에 불복이 있으면 법원에 그 처분을 취소하거나 변경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검사의 조치는 ‘구금에 관한 처분’이므로 준항고의 대상이 된다는 취지다.

이어 “검사가 조사실에서 피의자를 신문할 때 피의자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도록 피의자에게 보호장비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게 원칙이고, 도주·자해·다른 사람에 대한 위해 등과 같이 위험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보호장비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밝힌 뒤 “당시 A씨에게 도주, 자해, 다른 사람에 대한 위해 등과 같은 위험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정이 있다고 볼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금된 피의자는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하 ‘형집행법’이라 함) 에 규정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포승줄, 수갑과 같은 보호장비 착용을 강제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검사는 조사실에서 피의자를 신문할 때 해당 피의자에게 형집행법에 규정된 위험이 없는 이상 교도관에게 보호장비의 해제를 요청할 의무가 있고, 교도관은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집행법은 수용자를 호송할 때, 수용자가 도주·자해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클 때, 힘으로 교도관의 정당한 직무집행을 방해할 때, 교정시설의 설비·기구 등을 부수하거나, 교정시설의 안전 또는 질서를 해칠 위험성이 높은 때에 한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보호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형집행법 제97조 제1항, 제99조 제1항).

이번 대법원이 내린 결정으로 무리하게 피의자를 압박하는 수사 관행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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